광개토 대왕릉비는 당시 동아시아 강국으로서 고구려의 위상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백제와 신라의 상황, 왜(일본)와의 관계 등도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이에요.그런데, 비석에 기록된 일부 내용을 두고 우리나라와 일본이 서로 다른 해석을 한 적이 있어요.이는 일본의 역사 왜곡 문제로 확대되어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뜨거운 역사 분쟁으로 이어졌어요. 이는 광개토 대왕릉비의 비문에 있는 20여 자 정도 되는 짧은 문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주장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죠.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아요.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한자로 된 이 문장을 일본 학자들은 ‘왜(일본)가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를 격파하여 신민(신하와 백성)으로 삼았다.’라고 풀이하였어요.그러나 우리나라 학자들은 다르게 해석을 하였어요.광개토 대왕릉비가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념하는 내용이므로 백제와 신라를 격파한 주체는 당연히 고구려라고 해석을 하였지요.한편, 북한의 학자들은 고구려가 왜를 격퇴하였으며, 백제가 왜와 연결하여 신라를 침략하여 신하와 백성으로 삼았다고 보았어요.즉 백제가 친하게 지내던 왜를 끌어들여 신라를 침략하였고, 이후 고구려가 백제와 왜를 격퇴했다는 내용이지요.반면, 재일(在日) 역사학자 이진희는 비가 일본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면서 학계의 주목을 받았어요.즉, 19세기 말에 일본이 사람을 만주에 보내 광개토 대왕릉비의 비문을 파괴하고 석회를 바른 후 다시 새겨 비문을 조작했다는 것이었어요.그러나 비석을 연구하는 한 중국 학자는 당시 일본인에 의한 비문 조작은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했어요.19세기 말 광개토 대왕릉비가 다시 발견될 당시, 일본은 한반도를 침략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어요.그래서 옛 가야 지역에 임나일본부라는 기관을 설치하고 백제와 신라를 정복하였다는 것(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였는데, 광개토 대왕릉비의 내용을 그 증거로 내세우려 했던 것이지요.하지만 현재 일본이 주장한 임나일본부설은 부정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