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의자왕은 즉위 초기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 북쪽의 30개 성을 빼앗고, 대야성을 점령하면서 백제 중흥을 이루는 듯 하였어요.그러나 의자왕은 귀족들을 정치에서 제외시키고 자신의 아들 41명을 최고 관직에 임명하는 등 가까운 사람 중심으로 나라를 운영하고자 했지요.의자왕이 권력을 독점하려하자 귀족 세력이 거세게 반발하였어요.나라의 지도층은 분열되고 의자왕이 점차 사치에 빠지자 백제의 국력이 크게 약해졌어요.성충이나 흥수 같은 충신들이 의자왕의 잘못된 정치를 말리자 이들을 옥에 가두었어요.이를 본 백성들의 마음도 점차 멀어져 갔지요.혼자서 백제를 공격할 만한 힘이 없었던 신라는 오래 전 당에 지원군을 요청하였어요.김춘추가 지원군을 요청한지 16년 만에 당이 군대를 보내면서 나당 연합군이 만들어졌어요.백제가 흔들리는 틈을 노린 것이었어요.당의 13만 대군을 태운 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백제를 향했어요.목적지는 백제의 수도 사비를 끼고 흐르는 백강(지금의 금강) 하구의 기벌포였어요.이에 발맞춰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신라 군사들도 탄현을 향해 출정하였어요.나당 연합군이 백제로 오고 있다는 소식이 백제 의자왕에게 전해졌어요.의자왕은 감옥에 갇혀있던 흥수에게 사람을 보내 어떻게 방어해야 할 지를 물었어요.“기벌포와 탄현은 우리나라 요충지로 한 명의 군사와 한 자루의 창을 가지고도 1만 명을 막을 수 있는 곳입니다. 군사를 보내 두 곳을 철통같이 지키소서.”기벌포는 바닷물이 빠지면 넓은 갯벌이 생겨나 군사들이 상륙하기가 어렵고 수비하기에 좋은 곳이었어요.탄현도 높고 좁은 골짜기로 이어져 있었는데, 이곳으로 신라군을 유인하여 공격한다면 적은 수의 군사로 손쉽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곳이었지요.하지만 몇몇 신하들은 반대하였어요.“많지 않은 군사를 둘로 나누는 것은 스스로 패전을 부르는 방법입니다. 흥수는 죄인입니다. 임금과 나라를 원망하는 자의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기벌포, 탄현, 황산벌의 위치